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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홍과 그의 皇國 철학
오늘날한국철학의 접근방식에 박종홍의 철학을 몇 페이지 할애하지 않는 개론서는 드물다. 물론 편집자의 가치판단의 경향에 따라 그에게 주어지는 중요성은 크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논리를 강조하기 위해서든, 그의 논리를 비판하기
위해서든 여하간 그는 “한국의 위대한 철학자”로 평가한다.1) 이처럼 6.25 전쟁 후 한국철학의 대표자로서 평가를 받음으로써 일제시대에 이미 독일 관념론과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을 수용했고, 또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서 미군정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조선 교육 심의회”에서 고등교육 프로그램에 관계하였다. 그리고 민족분단의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의 핵심사상인 “中庸의 中和”2)의 논리가 도모하려는
현실 기득권 지배체제의 옹호라는 결과는 은폐되고 있다.
그의
중화철학은 무엇보다도 남달리 겪은 일련의 “전통”순응으로 특징지어지는 그의 개인적인 여정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출신환경,
최초로 받은 교육, 그리고 지배적인 지적흐름의 전통과 단절하지 못하였다.
죽을 때 까지 그의 “중화철학”은 전통적 “聖人”논리를 이어받아 우매한 백성(愚民)3)을 계도한다는 유산들의 새로운 형태의 총체이다.
1. 개인적 여정과 교육의 배경
1) 박종홍의 지적전개는 유교철학의 中和를 근거로 하였다.
한 학자에
대한 전기적 지표들을 제공하는 것은 상투적 관행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보게 되듯이, 한편으로 박종홍의 철학이 개인과 집단의
역사 속에서 구축되는 “태도(Haltung)”에 근거하여 개인적, 집단적
실천들을 설명하는 대신에 “천명(天命)”4)이라는 숙명론을 제시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어떤 다른 연구 대상과 마찬가지로 철학자에게도 동일한
과학적 원칙으로 분석하지 않고 分化 이전, 즉 태도를 보류한 “中”을 강조하고 있음이 그러하다.
“ 그러나 그런 말을 대담히 하고 있는 나 자신의 이
조잡한 소론도 결국 철학적 해명 에 대한 하등의 적극적 능력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 장차 어떠한 방법으로 어떻게 제일 보를 옮겨 나갈 것인가. 아니 나는 아직 여기에서 출발점에 대한 의문으로 제출하였을 뿐 이요, 적어도 결과에 있어서 비생산적이었음 자각하고 있다.
오직 不結果로 마친 막연한 윤곽이나마 장래에 이 땅에 나와야 할 새싹이 움트게 하는 하나의 터전을 이룩하여 보는 시도였다면 또한 지나친 말이 되고 말 것일까.”5)
학자의
생명은 그가 처한 사회에 대한 분명한 “태도”에 있다. 그러나 박종홍은 “하등의 적극적 능력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고
고백하면서 “不結果가 새싹”이라고 그 책임을 회피하는 영향을 인문학 연구에 남겼다. 즉 박종홍은 사회의 分化를
외면하고 있었으며, 사회계층들 속에서 그가 처하고 있는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우리가 그의 이론과 그 태도를 분석한다면 우리는 그 위치와 그가 그것들에 대해서 쓴 것을 파악함으로써 그가 우리의 인문학에 남긴
많은 특성들을 지적할 수 있다.
2) 이러한 의미에서 그의 傳記的 요소들은 객관적인 특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해준다.
박종홍은 1903년
평양부 창전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한학자였다. 집에서 초보적
한문을 배우고, 서당에 다니며 소학, 명심보감, 사략, 통감 등을 읽고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보
졸업 후, 사범과 일년 과정을 거쳐 보통학교 훈도로 취임하였다. 1925년6) 일본문부성 시행 중등교원 예비 시험을 동경에서 합격하고 서울의 경성사범학교에서
6개월 강습을 받고 1926년에 대구고보 교유로 발령받았다.
1929년 전문학교입학 검정 자격시험에 합격,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하여
1933년에 졸업하고 동시에 대학원에 입학, 1934년 대학원 수료,
제국대학 조수 발령, 1937년 이화여전 교수발령, 1944년 7월부터 조선총독부 학무과 촉탁으로 발탁되어 45년
6월 일제 패망 때까지 夫役하였다. 이와 같은 지적 경로에서 박종홍은
대구고보
교유 때까지 식민지 기초교육 담당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철학자에 이르게 된 것이 그의 가정환경의 여정과 무관할 수 없다. 그는 소년기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평양부 외진 곳에서 자랐다. 그리고 평양사투리 억양만 아니라 그가 최초로 획득한 많은 것들을 포기7)
하고서야 식민지 학교제도가 요구하는 것들에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조 후기의
외딴지방 특히 북쪽지방의 사회 환경은 거의 “식민지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은 특성”에 있었다. 이러한
종류의 객관적, 주관적 외적 관계가 한국사회의 중심제도를 , 특히 지적세계와
매우 특별한 관계를 조장하게 된다. 그 정도가 어떠하든 “지역적 차별주의”의 미묘한 형식들이 있게 되며,
이 형식들은 일정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을 구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식인
특히 철학자는 자신의 이질성을 상기함으로써 남들이 보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것들을 간파하여 “폭로”하는8) 것이다 그러나 박종홍의 경우 “일제에 순응하고 미군정에 찬성”하였고 그 여정은 급기야 파시스트 박정희를 찬양하면서 反共理念에 철학을
기초한 결과, 그의 태생지 북쪽지역의 민중을 모두 적으로 규정하고 말았다.
3) 하나의 이론은 결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문제 의식을 만들어내는 특별한 사회문화적 문맥 속에 위치한다.
박종홍의
지적 성장의 역사적 틀은 다양한 “사회 정치적 사건들”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국내적으로 그는 조선조 봉건 교육제도가 쇄락할 때, 서당에서 유학적 상하신분질서에 순종해야하는 훈련과 通鑑이나 史略을 읽으면서 중국역대 제왕들의 통치술이 곧 正義論으로 어린 나이에
주입되면서, “오직 기존 질서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이념이 각인되었다.
17세 때 철모르고 3.1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약
3주간 유치장에 구속되었을 때 민족의식을 자각하게 되었다고9), 말하지만 그때의
민족의식은 순박한 “우리와 남”이라는 단계로 감상적 태도였다. 보통학교 그리고 중등 전문학교 검정시험과 교유를 거치는 동안 주어진 제도와 규범에 모범의 태도로써
본인의 신상이 안정되고 또 새로운 “신분 상승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주어진 제도에 모범적일 때 “誠實 즉 中和10)”에 도달한다는 소년시대에 부친과 서당의 훈장으로부터
교육된 유교적 진리관이였으며, 또한 일제가 조선인을 교육하던 철학이기도 하였다.
박종홍이
소년시절에 받았던 유교의 “王道儒學”은 한․일 강제합방 이후 일본 천황을 聖人으로 하는 “皇道儒學”으로 전환되는 과정은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11)를 분석 연구해야만 한다.
다카하시는 1916년부터 대구고등 보통학교 교장에
취임하면서, 영남 지방의 주요문헌들을 조직적으로 수집 소장하게 되었다. 1919년 그는 “조선의 교화와 교정”이라는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해
3.1 운동이 일어나면서 일본은 지금까지의 경찰 정치를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전환하여 식민지 통치를 위한 “논리적
체계”를 위하여 조선사 및 사상사 정리 체제를 확립할 때, 다카하시는 조선 총독부의 시학관이 되어,
대중강연의 형식으로 “조선 유학사대관”을 발표하였다. 그 당시 조선인들에 의한 주체적
교육을 위한 대학 건립운동이 진행될 때, 일본은 이를 방해하기 위하여 다카하시를 대학 창설 준비위원회 간사로
하여 경성제국대학을 세웠다. 그는 핫도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와 같이 “학문과 행정”에 뛰어난 사람이 총장으로 추대 되어야한다고 총독에게 추천하였다. 그리고
다카하시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조선어학과 교수로 취임한다. 그가 「이조불교」와 “조선 유학사에서의 주리 주기파의 발달”에 관한 이론을 강의할 때 박종홍은 그의 강의에서 처음으로 유학의 이론을
체계 있게 학습하게 된다.
박종홍이
그때까지 서당에서 기초를 닦은 유학지식은 그야말로 “부모에 효도하고 왕에게 충성한다.”는 봉건 예의 질서라는 한계를 넘을 수가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통치 기본 목표는 전통적 유교 엘리트들(지방 사대부의 자식들)을 경성제대로 자연스럽게 유인하여 황국신민의 지도자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교육목표의
첫째 계획은 “政敎의
分離原則12)”이었기 때문에 종교에서 정치를 논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결과 皇道儒學 이후 지금까지 한국에서 유학이 정치문제를 배제한 禮의 문제에만 전념하고 있는 기형적 현실이다. 다시 말해서 "본래 孔․孟을 대표한 유학의 이론이 지배자의 폭력에 民의 권리를
대변하던 정치의 논리"라는 점은 사서의 기초논리구성에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일제는 성균관을 경학원(1913)과 명륜학원(1930), 명륜연성소(1944) 등으로
명칭을 변경 설치하여, 교육 목적을 “황국정신에 기초하여 유학을 연구하고 국민 도덕의 본의를 천명하여 충성스런
황국신민을 양성한다.”는데 두었다.
다카하시는 1913년부터 경학원 강사를 겸하면서
44년에는 명륜 연성소 소장으로 부임하여, “대동아 공영”의 논리를 교육하며 쓴
논문 “王道儒學에서 皇道儒學으로”가 그 대표작이다. 다카하시는 18년간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직 수행에서 조선 내 일반 교육을 식민지 지배체제로 확립하고, 다음은
1940년 중앙 불교 전문학교를 혜화전문으로 변경하고 교장이 되어 조선 승려들이 지닌 민족주의 사상을 타파하고 황국신민화를
위한 목적을 달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는 동경제대 한문과 (후에 문학
사학 철학과로 분리)에서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郞)의 서양철학 방법론으로 동양철학 분류법을 배웠고, 다카베 둔고(建部遯吾) 교수의 적자생존의 진화론에 근거하여 조선사를 일본의 지배에 예속시키는 논리로 정리하였다.
동경제대 졸업 후 1903년 조선 정부 초청으로 한성중학교(현 경기 중․고등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총독부 촉탁이 되고 또 합방 이후
1916년 대구고보 교장을 역임할 때, 퇴계학을 목적에 따라 높게 평가하는데서,
박종홍 등에 영향을 주어, 박정희 정권을 거쳐 오늘에 번성시킨 것이다.13)
그의 의도에 대한 논의는 뒤에서 자세하게 다루기로 한다. 그는 이러한 조선의 남쪽
중요한 교육기관의 장(경기중고, 경북고교, 서울대학, 동국대학, 성균관대학)을 모두 거쳐 목적한 대로 교육체계를 정리하였다는 점은, 해방 이후 우리 교육․사상문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과제란 점을 밝혀둔다.14)
이상에서
우리는 일제의 교육목표를 분석하면서, 그 교육제도에서 모범생이었던 박종홍이 기존질서 옹호와 그에 순종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이며 개인의 행복이 곧 창조의 철학”15)이라는 그의 태도를 파악할 수 있다.
2. 철학태도의 상반된 두 가지 ― 中和에서 反共으로 ―
우리들의
사유행위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그 하나가 “전통질서를 진리로 하고 그것에 저항 없이 따르면서 소수 지배층의 이익을 웅얼거림으(형이상학)로 옹호하고, 새로운 질서를 폭력적(파시스트)조직으로 억압하는 형태라면”, 다른 하나는 “진행되는
질서의 모순을 지적 폭로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알기 쉽게(과학적)
대변하는 태도(Haltung)이다.”
박종홍의
지적 성장배경은 국제적으로는 20-40년대 제국주의가 식민지 쟁탈과정에서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때라면, 50년 대에는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대립인 냉전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다른 한편 60년대에는 민족적 권리요구가 증대함으로써 세계적인 탈식민지 운동이 전개되었다.16)
국내적으로는
해방 이후 미군정의 “국대안”17) 계획에 의하여 미군 대령 해리스 앤스테드가 서울대학 총장에 취임하자 새로운 식민 교육의 시도라며, 전국적으로 동맹휴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박종홍은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미군정의 지원 하에
조직된 ‘조선 교육심의회’에서 활동”하였고, 이병도 김두헌 안호상 고형곤 이종우 등과 “국대안”을 적극찬동
실천하기 위하여 비밀리에 활동하였다.18)
이 시기에
친일파 세력이 변신 재기한 논리는 “친미 반공”이었다. 친미 반공을 무기로 한 친일파는 이승만 정권이 수립된 뒤에 친독재와 야합하면서 그 세력을 각처에서 뿌리내렸다.
오늘 우리사회의 부조리, 특히 폭력정치와 부패구조의 근원은 친일파 문제와 “신흥
사대주의적 친미파” 형성과정에 있다. 미국의 양해 하에 을사년 외교권이 일제에 강탈당하였을 때도 왕실과 양반지배층은
미국에 막연한 호감을 갖고 德을 베풀 것으로 기대했다. 친미 대표자 이승만이 미국정부에 조선독립을 청원하던
순정의 역사였다. 미국은 한국의 상해 임시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일제의 패전 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해체하여,
김구의 독립군과 함께한 귀국을 무장해제 시킨 후에 개인자격으로 허가하기도 했다. 진골의 친일파 박정희가 집권한 뒤 1965년 존슨은 베트남 참전을 요구했고, 오늘의 부시는 “악의 축” 선언으로 “대북전쟁을 협박”하면서 우리 민족의 평화정책을 위협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미 관계의 역사에서 미국을 “혈맹”으로 추종하며 미국의 이해를 지적하면,
무조건 “반미 용공좌파”로 몰아가는 매카시즘적 이론화한 박종홍의 반공철학을19) 이제 그 민족분열 음모를 폭로하고 추방해야한다. 더욱이 통일문제를 정쟁도구로 악용하는 친일파나,
신사대주의 친미파의 알 수 없는 관념론으로 대중을 희롱하는 愚民철학은 철저하게 폭로하고 규탄해야할 때이다.
또한 친일 전과자인 일부 언론의 “안보상업주의”가 반공논리에 편승하여 대중을 우롱하는 체계도 분명히 폭로해야만 한다.
일본
식민지 철학교육이 “정치 사회 경제 문제들”을 배척하는 것이었고 또한 미군정의 일반교육 계획도 그와 꼭 같은 것이었으니, 당시 우리 학계의 주도적 지적 흐름은
박종홍의 영향 아래, 정치 사회와 관계없는 전후 독일에서 논의되던, 그래서 우리에게는 공허한 “현상학적 실존”논리나, 미국의 이익에 진리의 기준을 두는 “실용적
도구주의”가 만연하였다. 때문에 한국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민족주의논의는 곧 반미주의이며, 반미주의는 용공주의다.”는 일반적 합의였다.20) 서구에서나
우리나라에서 50년대 철학의 지배적인 접근법은 “현상학”이었다. 이는
현상 다시 말해 주체의 인식에 나타나는 것을 인식 가능한 유일한 “현실”로 간주하는 주관적인 철학이다. 이
사조의 대표자는 후설(1859-1938)이지만 하이데거(1889-1976), 사르트르(1905-1980), 메를레 퐁티(1908-1961)와 같은 학자들도 부분적으로 현상학과 결부 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종홍과 고형곤이 하이데거의
본질, 영원한 본성, 불변의 내용이라는 용어들 즉, 불교나 유교의 “불변적 心性의 수양론”으로 사회현상을 표상화 했다. 때문에 동양철학의 “이것은
곧 저것이고 저것이 곧 이것이다.”라는 식의 “理, 氣,
四七論”을 우주론, 존재론, 심성론,
인식론 등으로 혼합하여 현재에도 철학이라는 명칭으로 강단을 차지하고 있다.
박종홍이나
그 후계자 조가경에게는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사르트르나 메를르 퐁티의 “인간은 다양한 사회적 경험 속에서 전적으로 자유롭게 스스로를 만들어 간다.”는 주장은 관심 밖의 것이었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주의자는 아니지만 “동반자”로 자신을 내세웠다. 그의 “실존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은 “순환적 환원론”의 접근법을 단절하는데서 “실존이
본질에 앞설 수 있었다.” 박종홍의 선배와 후배 철학자 신남철과 박치우의 논리21)는 새로운 헤겔 논리의 환원적 부활을 통해서 제국주의 파시즘에 이용한다는 점을 옳게 비판하고 있다.22) 그러나 박종홍의 경우 “향내적 태도와 향외적 태도의 종합”23)이라는 전통적 순환반복의 논리를
계승하고 있다. 신남철이나 박치우가 주장했던 Marx의 「자본론」 연구의
목표는, 자본주의체계를 연구함으로써 사회의 형성과 생산방식 전체에 대한 진정한 과학을 확립시킬 수 있는 개념들을
“독립운동”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1) 박종홍의 초기 연구들은 呪術的 고전의 전통을 제시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끝까지 그에게서 사회와 정치에 대한 성찰을 거부하게 된다.24)
“참된
韓國敎育의 건설은 우리자신의 힘에 의하여 우리자신의 땅위에 이룩되어야 한다. <溫故而知新>은 지금도 眞理다. 선인의 빛나는 정신을
굳어버린 미이라같이 대하여 좋다는 法은 없다. 다시금 우리들 속에 살려야 한다. 참된 敎育愛의 거룩한 희생적 정신은 退溪의 언행을 통하여 길이 빛나고 있는 것이다.”25)
이와
같은 그의 “감상적 민족의식은 후기 논고에서 서구의 실존주의 실용주의가 儒學에 이미 다 들어 있다26)는 열정을 보인다. 즉 溫故로써 至善의 仁을 체득하여 聖賢(知新)이 되는데
있다“27)는 개인의 자각적 사색과 力行을 주장한다. 때문에 박종홍은
”감상적 우리 것“을 사회과학적으로 비판하지 못한 데서, 더욱더 풍부한 人文學의 토론을 방해하게 된다.
그는
이로부터 하나의 근본적인 직관을 도출하였는데,
그것은 사회현상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개인과 계급들” 사이의 관계 체계들이 갖는 중요성을 외면한 것이었다.
철학적 분석에 대한 그의 과오는 어떤 “실천자”들이 자신들을 실천하게 하는 의미를 무시한데 있다, 즉 儒學(특히 퇴계의 경우)의 道德(禮)개념의 강조에서 사회적 실천이라는 “전략”의 개념을 무시하였다. 사회적 행위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전략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여러 다양한 사회 의장들 속에서 사람들은 부족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해 수단과 목표를 관련시킬 줄 안다.
퇴계가
전개시킨 “純善”을 목표한 봉건적 구조의 예(禮,上下身分秩序)를 주제로 하기보다 오히려 제국주의의
“목표를 위한 수단”이란 사회적 구조를 분석하여 일제의 조선 통치 전략을 폭로해야만 했다.
물론
박종홍에게서 자주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볼 수 있다.
“ 모순과
실천 모순은 실천에 의해 파악되고 다시 실천에 의해 지양된다.
이것이
곧 산역사의 과정이며, 또한 현실적 존재의 심각한 구체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28)
그러나
그의 형식은 모순과 실천의 역사적 현실을 말하지만 그 내용은 정반대의 中和論이다. 즉 모순과 실천이 진행되는 제국통치의 상황에서 독립의 문제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으며, 때문에 그의 현실은 여전히 봉건질서에서 설교하던, 추상적
“성인의 도덕”(中和) 그대로이다. 이는 곧 강자를 위한 대변일 수밖에 없으며, 그가 대변하던 당시의 강자는 일본천황일 수밖에
없다.
그가
말하는 성실(誠實)한 인간은 모태에서 출생하여 부족한 재화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자가 아니라, 번데기에서 나비로
날아간 그래서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졌거나 아니면 거창한 성인의 허식으로 변장하고 구름위에 날아다니는 인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인간은 나라의 주권이 강탈되고 “황국신민”29)으로 강압하던 현실세계에는
살고 있지 않았다. 자주 그는 “우리의 전통”30)을 말하면서 성인을
추구하던 “이상주의(天命論)”31)를 비판하여 단절하지 않고 고난의 시대 철학자가 도덕군자의 허식과 전통적 愚民敎育의 방법인 “웅얼거리는 관습”32)을 더욱 강화하였다. 「안녕질서의 방해」33) 즉 “조선의
독립을 선동 또는 그 운동을 시사 찬양하는 사항(7), 조선 민족의 의식을 앙양하는 사항(8)”의 규정들이 언론 출판을 구체적으로 단속할 때, 일간 신문 지상에 그의 논설이 시리즈 된34)
것으로 미루어, “웅얼거림의 표본”이거나, 그 논리는 일제가 원하던 대변이란 점은 자명하다. 이미 오래전에 “착실하게 살려는 모든 국민”35)은 “성실(誠實)”한 유교도덕 규범의 파괴와 함께 식민지 노예로 전락되지 않았나? 이에 반해 박종홍은 일제의
“모범적 교육자”라는 보호 장막 속에서 틀에 박힌 전통의 관료와 철학적 유산의 개념관리자로서 자신의 연구적 삶을 연명시키며,
그들에 복무하지 않았나. 그와 같은 태도는 그의 제자들이 계승해서 오늘날 정치․경제의
이해충돌을 외면한 “공상의 인문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철학이라는 담론을 빌려 우리의 현실과 격리된 서구의 문제만을
의도적으로 전파하고 있지 않나.
이제
철학의 목적은 보이는 것, 감각적인 것, 일상의 구체적인 것 속에서 포착될 수 있는 사회적 “현실”을, 고대부터 있었던 자신의 근원으로 되돌아 가 찾아야만 한다. 소크라테스의 담론은 공공장소와 시장거리에서 시작되었다. 결국 초기의 박종홍 철학은 사회적 이유 때문에 “웅얼거려야”만했다. 철학자란 그의 동료들 신남철이나
박치우36)처럼 그 사회로 나아가 누구와도 토론하고 그들의 말을 들으면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천자이다.
2) 박종홍 철학 방법은 하나의 主觀的反共 논리를 주도했다.
한편으로 “불변의 전통”구조를 진리로 고집하려는 유파가
일제시기 그 지배구조에 순응하던 皇國학파였다면, 다른 유파는 사회적 “진보(Progress)”에서 단순구조는 새로운 사회구조로 전환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45년 일본의 패망 이후,
첫 번째 유파에 속하는 안호상, 이병도, 김두헌,
박종홍 등은 “미군정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조선 교육 심의회에 활동”37)하다가
1950년대에는 미국의 교육 원조를 받아 박종홍, 김태길 등 철학계의 원로들도 미국
초청 ․ 재교육을 받고 귀국하여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순수의 일반논리학” 및
“인식 논리학”과 전쟁 후 미국 자본주의를 기준으로 하는 도구적 실용주의를 소개하는 데서 한국 철학계를 지도하였다.
다른 한편, 새로운38) 사회질서를 능동적으로
주도하려던 신남철, 김태준, 박치우 등의 유파는 반공이라는 극단의 친미주의의
논리와 제도적 폭력에 의하여 학계의 담론 밖으로 추방되었다.
한국
철학계에 대한 박종홍의 영향력을 이해하려면,
그가 처음서부터 종말까지 주장하는 “성실을 매개하는 「中」이나 순수 본질론”이 “너와 나”가 경쟁하며 살아가는 규범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해야만 한다.
“대저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자 모두가 같이 천지의
理 ․ 氣를 받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理와 氣는 합하여 마음이 되는 것이므로,
사람의 마음이 곧 천지의 마음이요,
나 자신의 마음이 곧 千萬人의 마음이다.
그 처음에 있어서는 內外 의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모두가
하나일 따름이다.”39) 「퇴계의 교육사상」
사실
이와 같은 “모두가 하나”라는 논리는 사회에 대한 정의와 개인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 상반된 견해를 가진 “여러 다양한 경향”들을 억압한다. 학문의 과학화는 여러 다양한 경향들의
유형학을 확립함으로써 사회현상의 다양성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해방이후 우리사회의 복수구조를 통해 철학자는
단지 전통시대의 도덕이나 성인 군자등과 같은 상징체계만이 아니라 사회(분단)자체에, 행위자들의 의식과 의지를 억압하고, 그들의 실천
혹은 그들의 표상을 방향 짓거나 구속할 수 있는 객관적인 구조들(국보법과 그 실천기관)이 존재한다는 점을 적어도 인정해야만 한다. 한편으로 사회구성의 형태에 따라 지각,
사유 행동구조의 기원이 다르고, 다른 한편으로 사회구조들의 사회적 기원이 특별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歐美理念을 논의해야만 한다. 때문에 비록 친미 논리라 하더라도 적어도 민족분단이라는 사회구조
논리에 대한 유형은 체계화해야만 되었다. 그러나 박종홍은 그의「일반논리학」을 “학의학으로” 규정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논리로 “지도자(이승만, 박정희)”도 결함이 있다는 점을 옹호했다.
“그리고 <어떻게>와 <왜>를 밝히는 과정을 우리는 그 일반적인
형식에 있어서 대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모든 사람은 과오를 범할 수가 있다. 모든 지도자도 사람
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도
과오를 범하는 수가 있다.>와 같이 한층 더 일반적인 旣知
의 사실 혹은 原理로부터 시작하여,
<어떻게>나 <왜>를 밝히는 것이 그 하나요,
<A라는 지도자도 과오를 범하였다.
B라는 지도자도 그러하였고, C라는 지도자도 그
러하였다. D라는
지도자도 그러하였다.>와 같이 개별적인 실례를 들어 이것을 <왜>의
근거로 삼아 <그러므로 지도자도 과오를 범하는 수가 있다.>하는 것이 다른 하나다.40)
그의
위 예문의 특색은 학의학으로서의 과학적 분석이 없이 전통시대의 “지도자의 과오”를 변호하고 있다. 가치판단의 중립을 전제로 한 과학적
사고에서는, “A,B,C
모두 죽는다. 고로 박종홍도 죽는다.”라는
가치중립적 과학의 논리가 요구된다. 그러나 그는 “지도자와 과오”라는 예문으로 어렸을 때 서당에서 각인된
성인이나 지도자에게도 과오가 있을 수 있다는 愚民을 설득하던 논리를 의도적으로 규격화 하였다.
<무엇, 어떻게, 왜>를 밝혀야 한다면, 그는 일제의 “皇國臣民 大同亞共榮”을 분석했어야 하며, “민족의 분단과 反共”의 논리를 상반된 견해에 따라 철학화 해야만 했다.
일제
패망과 6.25전쟁
이후 한국철학에서 영향력 있는 학자라면,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객관화해야만 한다.
가) 하나의 사회현상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었던,
개인 행위들의 집합에 의한 산물이며, 그 어떤 행동 주체들의 합리성도 토론해야만 하고
나) 권력 조직체들, 기업, 관공서, 학교 등의 구성체를 분석하고 그 조직
속 에서 박종홍의 철학 토대는
무엇이었나, 즉 일제 식민조직과 어떤 관계에 있었나?
다) 4.19 학생혁명과 5.16
군사 구테타는 어떤 성격의 차이가 있으며, 그것 은 우리 사회변화에 어떤 역할을 담당 하였나.
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화 일반적 상징체계(‘......인 것 같다.’ 책임회피)만
이 아니라 사회 자체에 행위자들의 의식과 의지에 관계없이
그들의 실 천 혹은 그들의 사유를
방향 짓거나 구속할 수 있는 객관적인 “구조들”(중앙정보부 등)을 토론해야만
한다.
그러나
박종홍이 고집한 “전통”41)의 찬양론은 갖가지 형태로 복고적 폭력 체제를 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가
죽은 오늘에도 이른바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그는 한국 신학의 기초자로”42) 그리고 “한국의 현대사상사에서 열암을 세계적인 철학자로 자랑하고”있다.43)이것이 지금까지 그 스승과 제자의 “학적행위(Wissenschaftliche Haltung)”의 전형이라면, 오늘의 학적행위는 그 어떤 논리의 “구조적 폭력성”을 폭로하는 데 있다.
그의 최 전성기는 1961년 5월 “국가 재건
최고회의 기획위원회 사회 분과 위원으로 추대”44)되었을 때부터이다. 그는 이른바 “반공민주 철학”45)으로 무장하고, 박정희
지도자의 비호 아래 70년대 이후 사회 구성원들의 상식과 일상적 개인의 독립된 주관의 주체적 이론들에 폭력으로
반격하면서 皇國의 “국가건설 성전”이론체계로
조국분단의 실천에 앞장서게 된다. 共産이란 최소의 개념은, “재산은
공유한다.”는 점에서 독점에 반하며, 독점자들에 대한 소외된 자들의
인권 요구이다. 북한을 공산당 지배 체제라 하여 멸공해야한다는 논리는 너무 감정적이고 폭력적이라고 지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체제에 모든 북한동포를 통합하기 때문이다. “세계의
모든 인간은 평등해야하고 함께 잘 살아야한다”는 명제를 우리가 합의하는 한, 박종홍은 “국가 건설을 위한
聖戰, 사투의 피의 길”46)을 선창하던 “황국신민”을 위한 논리로
“예외자” 즉 천황이나 박정희 독재를 “적극적으로 논변”47) 하였다는 점은 쉽게 드러난다.
중일
전쟁 절정기 철저한 사상 통제령 하에서 「人文評論」에 발표한 다음 글은 피할 수 없는 그의 황국철학의 실체이다.
“그러면
이 現實把握의 往路와 歸路의 비약적 전환이라는 긴중한 계기에 임하여,
자력
․ 타력을 초월한 절대의 유무 相轉하는 힘을 어디서 찾으면 可할 것인가. 나는 이것을 동양 재래의 술어용법을
본받아 <中>이라 명명하고 싶다... 현실 파악의 주체, 우리(일본제국-황국신민으로서의 ‘우리’지 독립하려는 우리가 아니다. -필자)의 騎士는
이성으로서의 부정뿐만 아니라 생명 자체를 내거는 만큼 심신전부를 아울러 구체적 실천으로써 최후의 死線에서 끝내 고정된 全有를 超克하는 순간 否定이
無底 의 底에 미치는 순간 <中>의 비약적 전환을 계기로
새로운 일상적 현실을 파악하게 된다. 이것이 곧 현실 파악의 영예스러운 歸路인 것이다. 그러나 <中>의 有無 相轉의 동시성은 往路가
끝나는 때에 歸路도 끝남을 이름이다. 이 때문에 현실 파악의 길은 往路 즉 歸路라는 독특한 성격을 갖게 된다.
이것이 또한 ‘부정 즉 긍정’이라는 것이다... 현실 파악의 길!
그것은 실상적 현실이 구체적 실천을 매개로 자각하는 과정이요. 문화의
창조를 위한 투쟁이요. ‘국가의 건설을 위한 聖戰‘이다. 현실파악의
길! 그것은 형극의 길. ’死鬪의 피의 길‘ 극소수의 ‘예외자’만이
능히 선두에 서서 참말로 걸을 수 있을 만큼 험난한 길이다. 과연 <온갖 고귀한 것은 드문 것인 동시에 또한 곤란한 것이다.>48)(1939)
여기에서
“가는 것이 오는 것이고 부정이 긍정이며,
<中>의 有無 相轉 동시성”의 논리는 곧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요.
조선인은 황국신민이며, 大同共營이 독립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다.”라는 논법이며, 성전에 영광되게
죽을 것이지 시끄럽게 비판하지 말라.”는 식의 논법은 1969년 「국민교육
헌장의 실천 과제」에서도 주장하고 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고 옆에서 구경하면서 잘됐느니 못됐느니 비판이
많을 줄 압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럴 때가 아닙니다.”49)
... 극소수의 ‘예외자’(일본천황과 박정희)만이 능히 선두에 서서 참말로 걸을 수 있을 만큼 험난한 길, 과연 <온갖 고귀한 것은 드문 것인 동시에 또한 곤란한 것이다.> 그렇다. 박종홍은 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에서 일제 신민화의
모범 교사였으며, 일본에게 귀하고 드문 ‘예외자’이면서 독립하는 데나 박정희 정권시기 민주화를 같이 논하기에는
‘곤란한’자였다. 또한 미군정하에서도 그는 민족 통일 세력에 ‘예외자’였으며, ‘곤란한’ 자였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반공”을 死鬪로 한 분단국가 건설의 성전 기사였다.
3) 박종홍의 많은 저작과 논설들은 현실에 대하여 많은 의문을 말하지 만, 결론은 언제나 “전통”에 근거한다.
그가
쓴 저서나 논문들의 목록을 훑어보면, 다양한 방향의 연구들이 뭉쳐져 있다. 실제로 예술, 교육,
철학, 문학,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의
그 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상당히 제기하는 듯하다. 그런데 실제로는 외관상의 다양성일뿐, “통합된 문제의식과 지속적인 사회과학적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반복되는 두개의 주제를 통해서 분명히 들어난다. 지배의
메커니즘과 불평등하고 분쟁적인 사회적 공간 내에서 사회적 행위자들의 실천의 논리 대신에 “전통적 심성의 주관적
도덕수양 논리”로 대치하려는 계산된 의지가 그것이다. 그의 저작들은 각각 이 같은 질문들을
<中, 혹은 誠實, 본체(實存)>라는 개념으로 보충․심화하고 그에 대한 “전통”적 예증을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한 학자가
체험한 역사적 상황의 중요성 외에, 한 철학의 형성과 그 “웅얼거림”(비과학적 논리, 그래서
대중을 愚民교육으로 인도하는)의 개념 구축이 기존의 유교 성인론이나 독일 관념론 그리고 미국의 실용주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을 분석해야만 한다. 모든 연구는 이론적 공간 속에서만 행해지지 않으며, 그들이 영감을 받은, 이미 이론적으로 성립된 과거 학자들의 연구에 근거를 둔다.
박종홍은
서두에서 언급했던 유교전통가문의 영향과 제국주의 전위(前衛)자들의 연구로부터 전통지배구조 순응적 본체론을 황국철학의 대표자인
다카하시 도오루(高橋亨 1878-1967), 하이데거(M.
Heidegger) 그리고 제임스(W.James)와 듀이(J.Dewey)에게서 끌어내어, 결과적으로 그에게 잠재해있던 “제왕의 이상”50)을 박정희와 함께 실천하게 된다.
“이와 같이하여 一而散하며 往且來하는 變易의 驅軸으로서의
中이야말로 天下之大本인 未發之中이 아닐까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러한 中이 現代哲學에서 문제되고 있는
소위 否定의 否定으로서의 絶對無와도 상통하는 점이 많음을 간과할 수 없으며, 역사적 현실에 관한 제문제의
초점과도 부닥치게 되는 것이다.”51)
이와
같이 고교형과 하이데거의 본체론적 “未發之中”을 인용하여 “無極而太極” 즉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논리로 독립 의지를 말살하였다.
4) 다카하시와 하이데거에게서 채용해 온 것은 박종홍에 의해 한국 철 학화 된다.
다카하시의
“조선 유학사에서 주리주기파의 발달”이란 저술에는 몇 가지 중요한 개념들이 있다. 박종홍의 정식화된 표명들이 갖는 특수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환기해 볼
필요가 있다.
다카하시는
처음(1903. 한성중학교, 현경기고등학교)부터 명륜 연성소(1944.
현성균관대 전신) 소장에 취침하여 일제 패망 후 죽을 때까지(1878-1967)
우승열패의 사회진화론에 근거하여 노골적으로 조선과 조선인을 멸시하는 등, 악질적인
식민지 관리이자 교수였다.52) 그의 첫째 의도는 이황과 이이의 “주기
주리”의 논변을 “존재론”으로 고립하고, 정치․경제․사회적
사실을 당파 싸움으로 추락시켜 용도 폐기화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四端七情의 사회 심리적 관계를 “선천적
도덕론”으로 규정하여 개인의 주관적 수양을 정치 사회의 가치척도로 정하였다. 자본주의(제국주의 지배하의
식민지 포함) 생산 관계는 생산 수단을 소유 또는 지배하는 계급과 피지배 식민지 수탈 대상의 노동 계급으로
대립되며, 반봉건 체제(구한말) 지배 계급은 일제와 결탁하여, 무산 노동자 농민 갈취 계급이었으며, 실제적인 경제․정치․사회를 지배하던 이데올로기 생산자들이다. 지배 구조의 구성 요소인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웅얼거리는 형태” ― 無極而太極, 有則無, 往則歸, 否定則肯定 ― 로 왜곡된 현실을 반영한다. 때문에
이데올로기는 결국 “허위의식”으로 귀결된다. 이와 같은 역사적 현실을 박종홍은 다카하시가 제시한 한국유학의
“존재론이나 도덕 수양론”의 잘못된 세계의 표상들을 끝까지 다음과 같이 웅얼거림으로써 대중의 착취에 협력한 것이다.
“...... 日本 高橋亨교수는 「主理派의
發達」이라는 논문 12면 이하에서 퇴계의 理氣說 을 도해 설명하며 외물의 자극을 A와 B로 구분하여 A 자극이 깊이 理를 촉발함으로써 四端이
나타난다고 하였고 俉村 薛泰熙 氏도「續理氣辯」 27면에서 主理說의 해명에 역시 이도해를 인용하고 있다. ...... 퇴계의 학설이 과연 理의 자기촉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형이상학적으로 보아 하이데거(Heidegger)의 이른바 근원적인 순수
생산적 구상력의 자발적 수용성을 연상시키는, 더 일층 고차적인 문제로 전개시킬 가능성이 발견될지도 모른다.
하여간 四七論에 있어서 촉발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서는 철학적으로 추궁할 여지가 있고 또한 중요한 과제의 하나라고
생각한다.”53)
“ 박종홍은
퇴계를 평생을 두고 충심으로 私淑하였으며”,54)“<선생의 學은 배우는 자 많으나 아는 자 적고, 아는 자가 있더라도 얻은 자는 더욱 적다.>”55)고 한 趙穆의 글을 인용하여 그 알 수 없는 신비학을 흠모하여 평생 교단에서 전파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카하시가 퇴계를 높이 평가한데도 “이른바 上智, 中人, 下愚”56)를 구별한 데 있으며, 박정희 파쇼정권이래
한국에서 퇴계철학의 확대 보급 또한, 같은 목적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즉, 愚民들을 上智의 “指導者”가 보호 지도한다는 철학이며 퇴계교육론이 그 핵심이다.
박종홍은
“하이데거의 근원적인 순수 생산적 구상력의 자발적 수용성”을 말하면서 그의 Sorge(관심)57)을 분석하고 그의 “주체적
통일의 일면성” 때문에 갈등과 투쟁을 소홀히 했다고 지적하지만, 그 실존 자체가 갈등과 투쟁에는 관심 없는
것임을 모르는가. 하이데거의 Sorge는 독일의
Sorge였으며, 히틀러의 체제 확장을 위한 Sorge가 아닌가. 박종홍은 1944년 총독부 학무과 촉탁으로
夫役할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논고 「우리가 요구하는 “이론과 실천”」에서는 독일 관념론을 “내면적 도덕론”이라 강렬하게 비판하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 말기 “聖戰에 참여 死鬪”하라는 주장과 박정희 독재시기 “반공 민주”론을 연관하여 분석하는데서 오늘의
한국철학 계보도 확인할 수 있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의 철학은 문화적 생산관계를 배제한 “理氣 존재론이나, 四七道德수양론”과 단절하고 경제적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와 소유하지 못한 자 사이의 사회적 장을 구조화하는
대립들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들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신남철이나, 박치우처럼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조선민족이 일제에 지배당하게 되는지를 사회면에서 규명하고, 왜 조선인이 지배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으며, 기존질서(일제)에 대한 합의 속에서 그 지배자들과 연대해야만 하는가를 명확히 밝혀야만 했다. 따라서 사회의
행위자들이 그들의 능력․지위, 혹은 그들이 지닌 권력을 인정받기 위해 그 합법성을 어떻게 창출하는
지를 폭로하는 것이 문제였다. 때문에 그 지배를 합법화하기 위한 식민지 학자들의 愚民化운동과 맥을 같이 하던
“한민족 개조론”에58) 대한 차분한 분석이 여기에 요구된다.
6.25 전쟁 이후 박종홍의 철학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실용주의가 새로운 개척, 씩씩한 건설,
희망찬 명일을 가지고 살아온 미국 사람들의 기질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59)고 주장하는데서 새로운 미국 지배질서에 대한 순응을 교육한다. 2차 전쟁 후 미국의 실용주의는 미국의 이익과 연관된 관찰에서 포착되는 사실들만을 “행동으로 구현하고자 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가 철학이 반드시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발현될 것을 강조한 것도 이런 실용주의 정신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60) 사실 실용주의는 객관적 세계(사실들의 영역)와 주관적 세계(의식, 가치판단, 직관의 영역 등) 사이의 단절을 특색으로 한다.
박종홍은 국가 재건 최고회의 기획위원이 되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反共主義 철학비판」61)을 통해서 황국신민시기부터 일관되게 주장하던 보편주의(中庸)와 단절한다. 그것은 몇 차례의 미국 연구비로 미국 대학 연수 과정을 거친 후,
철저한 친미주의로 전환한 그를 김석수는 “결국 박종홍은 현실에서 ‘활동하는 삶’을 이상적인 목적을 추구하는 ‘관조적인
삶’에 구속하는 정적이고 수동적인 과거의 철학을 거부하고, 지성의 활동적인 과정을 매우 중시하는 듀이의 철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62)고 지적하였다. 특히 그의 “전통문화”에 대한 열정은 실용주의와 실존주의를 우리 동양 유교사상 誠實의 논리에서 이미 다 포함하고 있다.63)고 비약하며, 정약용과 최한기를 전통과 서구를 주체적으로 섭취 종합했다.64)는 등의 쇼비니즘은 박정희 정권의 유지와 권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진실"로 되는 정치풍토는 박종홍의 독재정권 유지를 위한 “충성심과 권위에의 복종”을 강요한 「한국철학」65) 논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국의
사회역사학자 에릭 홉스보옴(E.Hobsbawm)은 “전통이란 끊임없이 의도적으로 재창출 되는 것이라 했다."66) 서구에서 근대화에
뒤진 독일과 일본 근대화의 경우 전통 사회 구조와 규범의 근대적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일본의 경우 메이지 유신이래 꾸준한 관심과 새로운 사회 적응에 노력하였다. 우리는 그들과
달리 우리의 노력으로 한말 전통 사회의 규범과 제도를 재창조하지 못하고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전환하게 되는데서 오늘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즉 우리 스스로 버려야할 것들도 일제가 파괴했다고, 일제에 대한 대항수단의 상징으로
보존 육성하는데 비극은 잠재해 있다. 이렇게 착종된 우리 전통의 가치와 제도는 산업화 이후에도 더욱 강하게
작용함에는 박종홍의 한국전통 철학 찬양론과, 또 그를 세계 철학자라고 숭배하는 그 제자 일파의 책임이 아니라하기
어렵다. 더욱 한심한 현실은 전통 유물이나 가치를 그대로 상업주의, 출세주의로 한계 없이 이용하며, 또한 반독재 민주투쟁을 주도하는 그룹도 돼지머리 놓고 呪文을
읽으며, 두루마기 입고 고사 지내는 지경에는 무엇을 탓하랴.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다. 일제가 보급한 현실 떠난 존재론이나 원시 시대의 고전들을 “코미디” 형태로 그 신비성을 보급하는
대중매체의 태도에서 오늘의 인문학은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리의 철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거리에서
대중과 경제․정치를 토론하였듯이 오늘의 정치․경제를 대중과 토론하는데서 되살려야 한다. 친일과 친미의 모범생의 낡은 논리가
이제 충분한 사려를 가지고 저항하지 않고 스스로 사멸하는 경우에는 새로운 인문학이 평화적으로 발전하겠지만, 그것이 이 새로운 필연성에 반항하는 경우에는 폭력적으로 단절하는 것이 역사의 진보가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박종홍의 순환 반복의 논리에 의하면 否定이 곧 새로운 肯定, 즉 대립물로 전환한다.
사회적
사실을 결정짓는 원인은 박종홍이 퇴계사상으로 강조한 개인의 심리상태(四七心性) 속에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발생한
사회적 사실들 속에서 찾아야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개인에게 가해지는 외적인 구속을
규명해야하며, 보편론적(天命, 實存...) 혹은 심리적(道德修養) 단순 결정 요인들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3. 유산과 그 철학비판
인문학의
분화발전 과정에서 박종홍의 한국철학 접근방식은 책임이 크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주장하듯이 “노동이니 物質的 生産이니 하는 것이 人間에게 있어서는 이미 사회적인
것이요 合目的的인 것이다. .... 物質的 생산이라고 하여 人間의 정신적인 활동과 떼어서 추상적으로 先後를
생각한다는 것부터가 千萬의 잘못이다.”67)라고 하나로 뭉쳐서 보는
방법은 사회적 분석은 불가하며 그
속에 속해 있는 행위자들 사이의 투쟁은 있을 수 없다. 그렇게 “사회적이고 合目的的인 것”이라면,
왜 그들 중 일부는 보존 혹은 확장의 전략을 이용하고, 또 다른 일부는 전복의 전략들을
이용하는가? 오늘 우리 人文學으로서의 哲學의 담론이 이와같이 한편에는 박종홍에 의해 광범위하게 보급된 “원생적
中和” 주의의 지지자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 진정한 사회과학적 교류를 통해서 세분화되고 있는 선택적 접근법의
지지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사회 과학적 투쟁이 가장 첨예할 뿐만 아니라 가장 생산적으로 드러날
때는 대립된 양자간에 동일한 사회적 모순을 공유하고 있을 때이다.
1) 박종홍의 皇國哲學 접근방식은 한국철학에서 한시대의 확고부동한 명성을 획득했다.
한국
철학의 여러 장들에서 박종홍의 영향을 받은 “원생적 존재론”(未發之中)연구가 “주류를 형성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박종홍이 제안한 전통적 ”中和論“이나 하이데거의 존재론(Sorge)에 대한 해석은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저서들 혹은 논문들이 입증하듯이 일정 역할을 거듭해왔다. 그 행동을 보류한 존재론(本體論)은 그 자신의 길에서
개척한 많은 테제들에 의하여 설명된다. 하지만 몇 개의 예만으로도 그의 ”지도자 즉 例外者“에 대한 이론의
중요성과 그 영향력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러한 방법론은 철학의 틀밖에 다른 인문과학들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오늘 우리가 그의 “원생적 존재론”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에서이다.
나는
앞에서 이미 “이것이 곧 저것이다”(無極而太極, 往則歸) 라는 “웅얼거림”의 방법을 지적하였다.
일반적으로 많은 연구들이 인간의 진리는 사회적 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채 추상적 존재방식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박종홍은 특히 식민통치시기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분하지 않고 “우리”라는 개념으로 황국신민을 말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여러 사회계급들로 분리되어 투쟁하고 있는 사회구조를 전통적 聖人論으로 설득하려는 태도에 결부되있다.
물질적 목표를 두고 벌이는 투쟁에 도덕적 심성론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접근법은 비판되어 마땅하다. 성인의 “仁愛”라는 개념은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적절치 않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폐기된 개념이다.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의 이행은
분쟁들의 변화, 행동주체들의 변화와 그 목표의 변화에 의해 표현된다. 오늘 우리사회에서 분쟁의 목표는 더 이상 독재정권 전복이 아니라 사회의 문화적 동향, 특히
국가에 의해 결정되는 문화방침을 “정치적 참여”를 통해 조정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전통적 관행을 용인하게
되는 기구들과 그들이 기획하는 결정들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 투쟁”이 제일 중요하다. 권력과 지배를 행사하는
집단의 지역이 옮겨지면서 분쟁은 더욱 확장되었다. 우리 사회의 집단들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박종홍의 방식대로 “웅얼거림”의 방법으로 지도자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들 고유의 문화를 발전시켜온
많은 중간계층에서는 “문화적 자유주의”로 무장한 특수한 실천들과 가치를 확산시킨다. 다른 어떤 계층들보다도
이들은 다양한 풍습에 대해 관대하고 인권과 자연의 존중에 관심이 많아 보이며, 개인의 자유와 복지국가를 통합하고자
한다.
2) 그는 철학논의에서 역사를 통합하지 않고 단절시키는데 노력했다.
과거현재사이의
대립은 필연적임에도 실상 그의 논리의 핵심은
“<中>의 有無相轉 同時性”에 두고 있다. 역사는 두 가지 형태로 우리의 육체에 각인된다. 하나는 (기계․기념물․책․이론들 속에)객관화된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성향형태의)체화된 상태로이다. 박종홍은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 그리고 6.25 이후 박정희 독재시기까지의 중요한 집단들의 서로 다른 가치지향을 표상하지 않았다.
그의 이론은 너무나 정태적이며 역사를 무시한다. “참된 敎育愛의 거룩한 희생적 정신은
퇴계의 言行을 통하여 길이 빛난다.”는 주제는 그것이 가진 비역사적이고 고정적인 성격 때문에 비판되어야 한다.
또 다른 비판은 전통문화의 자의성과 엄격성에 대한 점이다. 그에게 있어 전통 지배적인
문화규범들은 비시간적이고 보편적으로 드러난다.
3) 박종홍은 철학담론을 정치와 단절시킨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좌․우의
정치적 대립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자의 대립으로 환원 될 수만은 없다. 각기 다른 구조의 고유한 정치논리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보유자본의 양의 대조뿐만
아니라 그 처한 계층구조와 연관이 있다. 단순히 “자유를 사랑하고 共産을
반대한 그의 태도”는 정치 기피현상을 정착시켰다. 박종홍의 反共哲學의 접근방식은 행동주체들의 역할을 무시하고
개인들을 극도로 수동적인 존재로만 보았다. 그 때문에 분단된 민족의 북쪽사회 행동주체들의 자유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그의 결정론에서 일본과 미국의 “분열주의 철학”을 보급했다는 점을 비판함으로써 민족의 통합을 모색함이 오늘 우리의 과제이다.
" The Japanese Method by Park Cho-hong's
Philosophy "
박종홍의 황국철학
Yang Jai-hyuck
한국철학은
일제 강점기 이후 오늘까지 형이상학적 존재론의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방법론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박종홍이다. 한국철학의 접근방식에 박종홍 철학을 몇 쪽에 걸쳐 언급하지 않는 개론서는 드물다.
그의
철학의 특성을 세 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 첫 번째 특성은, 그가 어릴 때부터 주입된 사상은 유교의 왕에게 충실하고 부모에 효도해야 한다는
가치관이다. 그리고 일제 식민지 지배에서 그에게 주입된 논리는 “분화 이전의 中”을 근본으로 한다는 존재론이다.
때문에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대립, 즉 독립의 논리는 그의 철학에 없다.
“理가 氣이며, 無가 有이고, 往이 歸라”
주장하니, 이 논리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죽는 것이 사는 것이며,
항복이 곧 독립”이라는 일본인을 위한 철학이 그 특색이다.
2. 두 번째는 일제 패망 후 미군정 시기, 미군정에 협조하여 일본식민지 교육체계였던 경성제국대학을
미군지배 교육체제인 국립서울대학으로 전환하는데 적극 찬성하였다. 그리고 미군정의 연구비로 미국에 가서 재교육을
받고 돌아와서 미국 이익에 부합되는 실용주의 진리관을 교육하였다. 때문에 해방 후 민족의 통합이 요구되는
시기에 “일원적 본질론” 대신에 거꾸로 “자유냐 공산이냐”라는 양극단의 적대의 철학으로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특성을 보였다.
3. 세 번째는 일제의 태평양전쟁 말기 우리 청년 학생들을 동원하던 “성전에 참여하여 영광되게 죽으라”는 논리로 박정희 군사정권을 찬양하여,
국민교육헌장을 만들고 반공의 철학으로 북한의 우리 동포를 모두 적으로 규정하는 사상의 기초를 만들었다.
이상과 같은 그의 철학은 그의 제자들이 전국대학에 폭넓게 포진하면서 일반화되었다. 동서냉전체제의 붕괴와 우리 정치의 민주화 과정에도 불구하고,
그 독특한 제자와 스승간의 봉건적 학맥 때문에 그의 모순 된 철학을 오늘까지 비판하지 못하였다. 일제식민지와 미군정, 그리고 박정희 군사독재를 거치는 동안 답습되었던 학자들의 기회주의를 이제 비판하여 현실의 정치 ․ 경제를 주제로 하는 새로운 인문학, 즉 비판철학이 합리적으로 토론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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