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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분단의 경계선 너머로 한걸음 내딛다

Koreanische Literatur macht einen Schritt über die Grenze

      ---모국어공동체의 재구성을 위하여

 2007년 12월 06일 (목)

염  무 웅 교수  mwyom@ynu.ac.kr  

 

누구나 느끼는 바이지만, 한국은 지금 중대한 역사적 기로에 서 있다. 자칫하면  경제지상주의의 악령에 사로잡혀 사회적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는 길을 갈 수도 있고 구시대적 냉전주의가 다시 득세하는 어처구니없는 퇴행이 벌어질 수도 있다. 나는 문학도 이러한 현실변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으며, 그런 입장에서 한반도의 분단과정 및 분단극복 노력과정에 문학이 어떻게 관련되어 왔는지 이곳 독일에서 살펴보는 것을 뜻깊게 생각한다.

(1) 한반도 문제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2005년 7월 남-북한의 문인 2백 여명이 평양과 백두산-묘향산 등지에 모여 <6.15선언 실천을 위한 민족작가대회>를 개최한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과거 냉전시대의 한반도 현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대회의 성사가 그 자체로서 얼마나 놀랍고 획기적인 일인지 이해할 것이다.

  오랫동안 한반도에서는 남-북 주민들 간의 자발적인 접촉과 자유로운 왕래가 꿈에서도 바랄 수 없는 금기였다. 심지어 상대방의 실체를 사실 그대로 알려고 하는 것조차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제 얼마간 유명무실해지기는 했지만, 오늘날에도 남한에는 북한 주민과의 허가받지 않은 접촉을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이 있고, 북한에도 틀림없이 이에 상응하는 형법이 있을 것이다.

 한반도 사회에 끼친 분단체제의 부정적 영향은 너무나 광범하고 심층적이어서 일일이 거론하기도 어렵다. 아마 가장 치명적인 것은 그것이 사람의 생각의 자유를 구속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불구화했다는 점일 것이다.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제약이 가해진다면 문화의 존립기반 자체가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뜻에서 분단체제는 본질적으로 문화에 적대적인 체제이다. 문학도 이러한 반(反)문화적 체제의 희생자이다.

나는 1950년대 후반에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1960년대 초에 대학을 다녔다. 가장 왕성하게 작품읽기에 몰두하던 그 시절에 나는 유감스럽게도 북한에서 씌어진 단 한 편의 작품도 읽지 못하였다. 나와 같은 세대의 문학도들은 누구도 감히 북한 문학작품을 읽으려고 용기를 내지 못했고, 설사 읽고 싶었다 하더라도 주위에는 북한 책이 단 한 권도 없었다. 만약 어디선가 북한책이 발견되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심각한 공안사건을 일으켰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나는 먼 유럽 작가들의 책을 탐독하는 데 주로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실존주의가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어서, 싸르트르(J-P. Sartre)나 까뮈(A. Camus) 같은 프랑스 문인들이 우리 또래의 관심의 초점이었다. 반면에 나는 내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나머지 반쪽이 나의 시야로부터 차단되어 있다는 사실을 때로는 거의 의식조차 하지 못하였다. 북한은 우리 무의식의 지하감옥에 유폐된 금기이자 공포일 뿐이었다. 이것은 설명할 필요도 없는 비정상(非正常)이다.

문제는 내가 북한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사람은 엄청난 서적들의 더미 중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소량의 책을 골라서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과거의 한국처럼 이념적 금기가 일상화되어 있는 억압적 사회에서는 개인의 취향을 말하는 것 자체가 현실을 외면한 사치이며 일종의 자기기만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인들은 남에서든 북에서든 외부적 강제력에 의해 통제되는 힘들고 불완전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이렇게 지난 시절을 조금만 돌이켜보더라도 남쪽 작가 1백 여명이 한꺼번에 북으로 올라가 그곳 작가들과 한자리에 앉아 공개적인 대회를 가졌다는 것은 기적(奇蹟)과도 같은 사건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 금지의 경계선을 넘는 일이고 심리적 억압에서 해방되는 일이다. 적어도 그런 목표를 향해 첫걸음을 떼어놓는 일이다.

이번에 북한에 함께 간 남쪽 문인들 중에는 유명한 소설가 황석영이 있었는데, 그는 잘 알다시피 18년전 북한을 방문했던 일 때문에 5년간의 해외망명과 5년간의 감옥살이를 겪어야만 되었다. 똑같은 사람의 똑같은 행동이 어떻게 이처럼 다른 사회적 수용의 대상이 되었는가. 이 변화가  뜻하는 바를 정치사적 및 문학사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 오늘 내 강연의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2)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대표적 분단국가들인 독일과 베트남이 결국 통일을 이룬 데 비하여 한반도가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 있는 것은 나라마다 분단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한반도의 분단은 현실적으로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대단히 난해하고 복잡하며 동시에 극히 현재적인 쟁점이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에 대한 논의는 나 같은 비전문가가 끼여들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주제이다. 그러나 문학의 전개과정을 사회현실과의 긴밀한 연관 속에서 바라보아야 정당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분단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이론적 과제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단계에서 미-소 양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에 38선을 경계로 한 분할안을 구상한 것은 미국이었지만, 소련은 미군이 일본과의 마지막 전투에 발이 묶여 있는 동안 한국땅 전체를 차지할 수 있었음에도 미국의 그 분할안에 동의하였다.

어쨌든 1945년 12월 모스코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상회의는 일정한 기간의 신탁통치과정을 거쳐 한반도에 하나의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방안에 합의하였다.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무의미한 것이지만, 만약 이때 남북한의 정치지도자와 국민들이 내부적 타협에 성공하여 이 신탁통치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면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오스트리아처럼 중립적 통일국가로 출범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의 역사는 그와 다르게 전개되었다. 남한에서는 찬탁-반탁 간의 대립 이외에도 갖가지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둘러싼 극심한 이념적 분열과 내부투쟁을 거친 끝에 친미주의자 이승만과 친일파 보수세력의 야합에 의한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이어서 북한에서도 항일유격대 출신의 김일성이 소련의 지원을 등에 업고 좌익세력을 규합하여 또다른 정부를 구성하였다.

분단이 기정사실로 굳어져 가게 된 데에는 이러한 국내적 요인 이외에도 냉전체제의 성립이라는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미국의 냉전전략이 한반도에 관철되는 과정에서 김구(金九)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과 수많은 민중들의 반(反)분단 투쟁이 전개되었지만, 제주도 4.3항쟁의 비극적 사례가 보여주듯이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도 결국 실패하였다. 그리고 뒤를 이은 한국전쟁은 분단을 더욱 강화하고 고착시키는 계기로 되었다.

현실에서의 분단과정은 문학의 영역에서도 재현되었다. 일제시대의 한국문학은 아주 거칠게 요약하면 계급투쟁의 이념을 추구했던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중심의 사회주의적 경향과 정치문제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다종다양한 예술주의적 경향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이 경향들은 해방후 다시 세포분열을 일으켜 여러 문인단체의 난립으로 표현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은 문인들을 포용하고 영향력이 컸던 단체는 소위 민주주의적 민족문학을 표방한 <조선문학가동맹>이었다. 이에 대립하여 계급주의적 입장을 좀더 분명히 내세운 단체도 있었고, 반대로 보수적인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닌 단체, 좌파의 정치주의에 반대하여  순수문학 지향을 자칭하는 젊은 작가들의 단체 등이 다양하게 결성되었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점령과 동시에 남북이 군사-지리적으로 분할되었을 뿐더러, 이미 점령 초기부터 정치-문화적인 측면에서도 남북이 점차 상호 독립적인 단위로 분리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저명한 작가들인 이기영(李箕永)과 한설야(韓雪野)가 1945년 11월 과거 그들의 활동무대였던 서울이 아니라 평양에 올라온 것을 계기로 북한지역 문단은 서울 중심의 단일문단에서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응집력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문학에서의 남북분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물론 초기에는 이를 저지해 보려는 움직임이 없지 않았다. 한설야를 비롯한 북한의 문화예술인들 18명이 서울로 내려와 남쪽 문인들과 회합한 결과, 1945년 12월 13일에 통일적인 <전국문학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대회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어떤 의미에서 2005년의 <민족작가대회>는 60년전에 유산된 대회가 냉전시대의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마침내 성사된 것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어떻든 1946년 3월 25일 <북조선예술인총연맹>이 결성됨으로써 문학과 예술에서도  분단은 명백하게 가시화되었다. 당시 남쪽에서는 좌익활동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  본격화되고 남로당이 불법화됨에 따라 많은 진보적 문인과 지식인들이 속속 월북을 결행하였고, 반대로 한국전쟁 시기에는 북한체제에 불만을 가진 문인들이 대거 남하하였다. 이로써 남한과 북한에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두 개의 독립적인 문학이 존재하게 되었다.

(3) 자신있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북한문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체제와 문학의 유례없는 밀착이 아닌가 한다. 한 마디로 문학이 철저히 정치논리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1967년 전후 김일성을 정점으로 하는 유일체제가 확립됨으로써 그 체제의 단일성에 어긋나는 이질적인 문학은 설 자리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사회가 그러하듯이 북한문학이 본질적으로 다양성과 개방성을 결한 것은 그런 점에서 체제의 불가피한 귀결이라고 할 것이며, 민족전통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실천적 의지를 찬양한 것 또한 북한식 자력갱생(自力更生)의 노선에 부합하는 미학적 원칙이라 말할 수 있다.

 반면에 남한에서는 미국의 압도적인 영향 하에 미국식 자유주의와 반공주의의 온갖 혼란과 병폐들이 무질서하게 난무하였다. 아마 이러한 상황에 경종을 울린 사건은 이승만 독재정권을 퇴진시키는 데 성공한 1960년의 4.19혁명일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의 지식인사회는 근본적인 자기반성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학에 갓 입학하여 겪은 4.19혁명의 경험은 나 개인에게도 커다란 각성의 출발점이 되었다. 특히 4.19이후 대학 캠퍼스에서 맛본 지적 자유와 비판정신은 일생동안 나에게 영감의 원천이고 행동의 준거였다. 물론 나는 시종일관 순수한 문학도였지만, 그러나 4.19혁명을 통해 분출된 민주주의-민족주의-자유주의의 한국적 혼합을 사회현실 속에서 추구하는 것은 나의 경우 문학적 실천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입장에서 나는 서구의 현대사조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주체성 없는 문학과 현실을 외면하는 도피주의적-복고주의적 문학을 아울러 비판해 왔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 1970년대는 경제적으로 고도성장을 달성한 시기인 동시에 그 그늘에서 농민과 노동자 등 일반민중이 커다란 희생을 치른 시기이다. 당시의 박정희 군사정권은 희생에 항의하는 민중들의 분노를 폭력으로 억누르는 동시에 제반 민주주의적 절차와 시민적 권리를 유보하였다. 지난 11월 13일은 젊은 노동자 전태일이 노동조건의 개선을 외치며 분신 자결한 지 37주년 되는 날인데, 김지하의 <오적(五賊)>, 신경림의 <농무(農舞)>, 조태일의 <국토(國土)>, 황석영의 <객지(客地)>와 같은 뛰어난 비판적 작품들이 전태일의 분신과 비슷한 시기에 잇따라 발표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의존적-억압적 현실에 대한 미학적 저항으로서의 새로운 문학의 출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의 생산과 함께 이제 한국문학은 민중의 편에 서서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조직적인 활동을 개시하였다. 1974년은 기념비적인 해로서, 그해 1월 7일에는 62명의 문인들 이름으로 민주적 헌법개정을 청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11월 18일에는 101명 작가들의 공동서명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약칭 자실)의 결성을 선포하고 시인 김지하의 석방을 요구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그후 1980년 5월 광주의 참극을 겪고 다시 1987년 6월 민중항쟁의 성취를 이룩한 다음, 이런 고난과 투쟁을 바탕으로 <자실>이 새롭게 조직을 확대 개편한 것이 오늘의 <민족문학작가회의>이다. 그로부터 꼭 2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 그동안 이 단체가 걸어온 문학적-사회적 발자취를 살펴보는 것은 별개의 과제일 것이다.

(4) 문학은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이며 시인 김수영의 말대로 <자유의 이행(履行)> 그 자체이다. 문학적 창조의 과정은 언제나 의식의 확대, 상상력의 확장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정치적 관점에서가 아닌 문학 본연의 요구에 따라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통일을 지향한다. 작가회의가 출범 직후 북한의 조선작가동맹에 남북작가회담을 제의했던 것은 그런 점에서 본래적인 문학행위의 일부이다.

남쪽 작가회의의 제의는 즉각 북쪽 작가동맹의 호응을 받았다. 남북간에 몇 차례 메시지가 오간 끝에 1989년 3월 27일 작가회의 대표단은 북한 문인들과의 회담을 위해 판문점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대표들이 도중에 경찰에 연행되고 대표단을 이끌던 고은 시인이 구속됨으로써 회담은 좌절되고 말았다. 판문점에서 남쪽 대표들을 기다리다 헛되이 돌아간 북한 시인 오영재는 그때의 아쉬움과 동포애를 감동적인 시로 읊어, 후일 남쪽 독자들에게까지 널리 읽히게 되었다.

남북관계의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이 마련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의 평양상봉과 그들에 의한 역사적인 공동선언 발표이다. 오랜 단절과 적대의 세월을 보낸 끝에 드디어 남과 북은 교류와 왕래, 화해와 공존의 시대를 맞이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것은 지구상에 남아 있는 마지막 냉전유산의 해체를 알리는 신호였다.

2005년 7월의 남북작가대회는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남북관계를 문학의 차원에서 반영한 행사였다. 이 대회에서 남북의 문인들은 6.15공동선언 정신의 실천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첫째 남북의 작가들이 함께 참가하는 단일한 조직을 결성한다, 둘째 공동의 편집위원회를 구성하여 남북 작가들의 작품을 함께 싣는 문학잡지를 정기적으로 발행한다, 셋째 통일운동에 기여하는 우수한 작품을 선정하여 문학상을 수여한다는 등의 세 항목을 박수로 채택하였다.

이 합의 중에서 지금까지 실현된 것은 첫번째 항목으로서, 2006년 10월 29일 금강산에서 남북 문인들이 모여 역사상 최초로 남북단일조직인 <6.15민족문학인협회>를  결성하였다. 지금부터 꼭 1년 한달 전의 일인데, 당시는 북한의 핵실험이 있고 난 직후라 분위기가 살벌했지만, 문인들은 문학의 위엄을 지키고 이 땅의 평화정착에 기여한다는 나름대로 자못 비장한 각오로 휴전선을 넘었던 것이다.

남북 작가들의 잇딴 교류와 단일한 문인단체의 결성은, 거듭된 얘기지만, 과거 냉전시대의 눈으로 본다면 놀라운 사건이다. 그것은 분단체제의 질곡을 극복하기 위한 힘든 장정(長征)에서 분명히 경계선 저쪽으로 한걸음 내딛는 일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판단할 때 진정한 문학적 교류는 아직 걸음마 단계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남북의 문인들이 여러 차례 만나 공적인 모임을 가진 것은 사실이고,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의의가 있다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모임들에서 공식적이고 외면적인 접촉 이상의 심층적 내면적인 교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 지나친 신경과민인지 모르지만, 나는 북측 작가들과 동석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길을 의식해야만 되었다.

오늘날 남북의 작가들이 서로에 대해 관심과 호의를 가졌다는 것은 만나는 첫순간에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반세기가 넘는 동안 다른 정치체제, 다른 사회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다른 종류의 감정세계 속에서 생활해온 데서 생겨난 이질감이 서로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음을 아울러 느끼지 않을 수 없다. 60년이 넘는 남북 단절의 상처가 가장 심각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마 언어일 것이다. 모국어를 생명으로 하는 작가들에게 남북 언어의 이질화는 예상 못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학에 있어서의 분단과 분열의 극복, 즉 남과 북과 해외의 모든 동포들이 창작의 주체로 참여하는 모국어공동체의 회복은 가능할 것인가. 이것은 내 생각에 정치적인  통일보다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민족통합의 과업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통합은 정치적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문제점들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길게 논의할 여유가 없지만, 제대로 된 남북통합이 달성되려면 남북간에 다방면적인 교류와 접근이 꾸준히 진행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그와 병행하여 남-북 사회의 내부에서 각사회의 성격에 상응하는 점진적이고도 전면적인 자기쇄신과 민주적인 개혁이 뒤따라야 한다. 통일은 남북으로 따로 존재하던 두 개의 현재상태를 단순결합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의 화학적 결합에 의해 제3의 더 높은 상태로 질적인 비약을 하는 것이다. 지난날 독일이 목표로 삼았으나 그후의 통일과정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과제, 즉 <접근을 통한 변화>야말로 한반도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월초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고, 여기서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공동선언>이 채택되었다. 이 선언은 정치-경제-군사 등 핵심적인 분야 이외에도 역사-언어-교육-예술-체육 등 여러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를 확대함으로써 민족동질성의 회복에 기여하는 사업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것은 분명 희망의 약속이다.

그러나 희망이 현실로 되기 위해서는, 거듭 강조하거니와, 남북한 사회 자체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주체적으로 달라져야 하고,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일상적 삶이 변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는 자기혁신을 롱해 더 나은 삶의 지평을 열어나가야 한다. 그러한 변화를 생활현실의 가장 미세한 부위에서 그리고 가장 민감한 언어적 형상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 문학이라 할 때, 오늘 한국문학의 어깨 위에는 고난과 영광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하겠다.*

6.15정신

615 유럽공동위원회